
이소선합창단이 임기윤 목사 45주기 추도식에 함께합니다.
일시: 7월 26일(토) 16:00
장소: 기독교회관 조에홀
곡목: 군중의 함성, 나 하나 꽃피어
(지휘: 임정현, 피아노: 정효)
“나 하나 꽃피어”
임기윤 목사의 죽음은 한 사람의 비극을 넘어, 한국 민주주의의 어두운 시간을 비추는 빛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이들의 헌신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소선합창단은 임기윤 목사의 뜻을 기억하며 그가 남긴 신앙과 실천의 유산을 노래로 되새기고자 이번 추모의 자리에 함께합니다. 우리의 합창이 시대의 양심을 잇는 작은 촛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 임기윤 목사를 기억하며 (45주기)
임기윤 목사는 1922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조만식 선생의 지도 아래 청년운동을 하다 소련군의 탄압을 피해 남하하였고, 그 과정에서 “살아남는다면 목회를 하겠다”는 신념을 품고 신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1951년 중앙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제주도와 부산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고, 1966년 감리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 그는 진보적 기독교 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부산기독교연합회와 부산교회협의회 총무를 지내며 활동하였고, 1975년에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연대한 ‘사회정의구현 부산기독인회’를 결성해 회장에 취임했습니다. 이 단체는 함석헌, 서남동, 문동환 등 지식인을 초청해 강연을 여는 등 유신 체제에 맞선 교회 안의 민주화운동 조직이었습니다. 1976년에는 ‘부산교회인권선교협의회’를 결성해 회장으로 활동하며 종교계 인권운동을 이끌었고, 김대중 등 정치범 가족을 지원하는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직후, 그는 교회에서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설교를 하며 전두환 군사정권을 비판했습니다. 며칠 뒤,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내용의 익명 협박 편지가 제일교회 교인의 이름으로 발송되었고, 경찰이 교회를 찾아와 전두환 정권에 대한 견해를 묻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임 목사는 “정치 잘하고 있다고 말 못한다”고 답했고, 이 발언은 곧바로 계엄사령부의 감시 대상으로 이어졌습니다.
1980년 7월 18일, 그는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으로 출두하라는 연락을 받았고, 다음 날인 7월 19일, 국군보안사령부 부산분실(일명 삼일공사)에 출두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던 중, 7월 21일 낮 12시 30분경 혼수상태에 빠졌고, 국군통합병원을 거쳐 부산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7월 26일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국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가혹행위를 부정하고 ‘고혈압에 의한 자연사’라고 발표했지만, 평소 혈압이 정상이었고, 병원에서 시신을 확인했을 때 뒷머리 왼쪽이 3cm 가량 찢어져 피가 말라붙어있었던 사실과 2000년대 초 유골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에 외부 가격에 의한 금이 있었음을 증언하며, 타살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습니다. 이에 고문과 강압수사에 의한 타살 의혹은 오늘날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임기윤 목사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가 아닌 지역에서 진상을 알리다 희생된 ‘광주 밖 희생자’로 기록됩니다. 그는 유신과 군부독재의 억압 아래에서도, 신앙과 양심에 따라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불의에 침묵하지 않았던 목회자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신앙과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실천의 상징입니다.
그는 어둠이 짙게 드리웠던 시절, 자신의 삶을 한 자루 촛불처럼 태우며 이 땅의 빛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매년 그의 기일을 기억합니다. 이는 단지 과거를 되짚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민주주의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 실천이기도 합니다.